선교사의 도구, 접촉점

무코가와교회 0 828

선교사의 도구, 접촉점

 

우리가 생활을 편리하게 하거나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회사라는 도구나 점포라는 도구가 필요하고 그런 도구를 가질 여유가 없을 때에는 기술이라는 도구라도 가져야 한다.

복음도 유용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전하는 자와 전함을 받는 사람 사이에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본 선교사가 일본선교의 현장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된 접촉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본대로 느낀대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저 한다.

현대사회를 “인터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영어의 “인터(inter)”는 “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방과 방사이를 연결하는 전화를 “phone”이라는 말 앞에 인터를 붙여서 “interphone”이라고 한다. 고속도로와 일반도로 사이를 연결하는 부분을 “change”라는 말앞에 “inter”를 붙여 “interchange”라고 한다. 컴퓨터의 “net”와 “net”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를 “net” 앞에 “inter”를 붙여 “internet”라고 한다.

현대사회는 사이(inter)가 잘 연결된 사회일수록 선진사회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국일수록 사람과 사람사이, 조직과 조직사이, 나라와 나라사이, 자기문화과 다른 문화를 잘 연결된 사회가 선진사회이다.

선교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타국에 가서 타문화권과 접촉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문화도구중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를 다 동원해서 피선교지의 사람들과 사이를 연결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크게 사용한 인터로서는 학교(교육)와 병원(의료)과 사회복지 시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턱대고 “예수천당”을 외치기 전에 우선 선교현지인을 만나기 위해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재공하기 위해서 접촉점을 찾으려고 애쓴 흔적이 어느 선교현장을 보더라도 확실하였다.

일본의 경우, 학교나 의료사업은 벌써 사회가 교회를 앞지르고 있기에 더 참여할 부분이 없고 앞으로 참가해야 할 접촉점으로서 장수사회가 되어 노인인구가 점점 불어나는 현실을 감안하여 노인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복지라는 도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여 이 분야가 개척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현장에서 사회복지 사역에 있어서 개신교의 역할이 어떻했는가를 살펴보고 앞으로 일본 선교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다루고자 한다. 비단 일본뿐 아니라 다른 선교지에서도 참고할 일고의 가치가 있으리라 사료되어 필자의 경험을 삽입하면서 이 글을 진행해 가려고 한다.

 

1. 성경적인 근거

아무리 좋은 도구라고 하더라도 비성격적인 도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 교회에는 유익하나 그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면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 부분을 간략하게 그 근거를 살펴보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사람들에게 유용하고 복된 도구를 사용하셨다. 우선 치유사역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소경과 앉은벵이를 비롯한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되 인산인해를 이루어 따랐다.

당시에 혼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쳐도 사람의 목소리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기에 몇 사람에게는 들릴지 모르나 몇 천명에게 전하기는 힘들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호수가에 사람들이 앉아있게 하고 베드로의 배를 빌려 바다속으로 들어가셔서 그 음성이 호수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베세다 들판이라는 자연적으로 방음장치가 된 것으로 보여지는 곳도 사용하셨다. 그 외에도 사람이 잘 모이는 회당이나 우물도 사용하셨다.

사도 바울도 회당이며 로마로 가는 배도 사용하여 될 수 있는대로 사람들을 접촉하기 쉬운 도구를 사용하였다.

 

2. 일본선교에 현장에서서는 선교초기부터 사회복지는 접촉점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선교에 있어서도 접촉점 문제는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중요시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의 성격이 서구인들처럼 쾌활하지도, 우리 민족처럼 친해지면 곧 바로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아니라 겉보기에는 상냥하고 친절해 보여도 막상 종교문제에 들어가면 가계(家系)의 종교적 칼라등의 문제로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선교는 오랜시간을 들여서 이들과 접촉하면서 서서히 접근해야 하고 끈질기에 대응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인을 접촉하는 접촉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능하리라 본다. 예를들면 한국어 교실을 열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김치를 담그는 방법을 가르치는 요리교실로, 한국의 드라마를 알아듣도록 하는 문화교실등으로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일본에서도 접촉점으로 그 지역 사람들의 환경에 맞는 문화적인 접촉점을 찾기 위해 선교사가 혼신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있다.

일본의 동북의 아오모리는 지방은 추운지방이라 여름과 겨울에 온도차가 심한 곳이다. 이곳에는 벼농사로 주민들이 살아감으로 늘 가난에 쪼달린다는 것을 알고 아오모리현 히로사기시(弘前市)에서 선교하던 미국인, John Ing(1840年-1920年)선교사는 1875년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던 학생 10여명과 자신에게 세례를 받거나 복음을 받은 성도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처음으로 고국에서 가져 온 사과를 대접하였더니, 그 맛에 놀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맛있는 과일이 있는냐고 하면서 크게 반응을 보이자,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심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에도 사과재배를 하여 벼농사에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사과농사를 짓게하여 어려운 생활고를 이겨가게 하려고 그 묘목을 수입하여 재배를 지도하면서 시작된 사과농사는, 일약 아오모리를 일본의 유명한 사과산지로 발돋음하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본 선교사가 보육원 전국 연수회 참가시에 죤 잉 선교사가 개척한 일본기독교단 히로사키교회에 수요기도회에 참석하여 담임 목사에게 들은 것임)

NHK방송이 프로잭트X라는 방송을 하면서 “후지사과”(일본에서 가장많이 재배되는 품종으로 1962年에 「후지」라고 命名하였다. 품종명의 유래는 육성지였던 아오미리현 후지사키(青森県藤崎町)라는 마을의 이름과 명봉 후지산(名峰富士山)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임) 가 만들어져 보급하기까지의 모습을 그렸는데 1939年에 국광과 데리샤스를 교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아오모리현 농림성 원예시험장 동북지소(青森県農林省園芸試験場東北支場)의 개발연구팀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 후지사과를 만들었을 때 너무 맛이 있어 많은 과수원 경영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자신들이 연구개발하여 만든 사과나무 가지를 다 절단하여 접붙이도록 제공하였다. 그 정신이 바로 사과를 전하여준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이웃사랑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본 선교사의 개인의견임) 이렇게 하여 후지사과는 2006年 현재 세계의 년간 사과생산량이 약6천만톤(約6千万t)인데 그중에 1230만톤이 후지가 생산될 정도로 많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선교사가 복음과 함께 지역사정에 맞는 문화와 생활면에서의 접촉하는 일이 지역주민들은 물론이고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힘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선교사의 도구로서 접촉점을 만드는 일은 필수적인 사항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노인세대에 관심을 기울여할 이유

전후 경제성장에 의하여 국민의 생활수준은 항상하고 의학, 의료기술의 진보로 일본인들의 평균수명은 비약적으로 신장하여 지금은 세계 제일의 장수국이 되었다. 장수사회가 된 것은 좋지만 노후를 맞이해야 할 노인에게 있어서는 여러 가지 불안의 요소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몸은 약해지고 자기에 정신적인면도 약해지고 일부의 사람들은 침해성 질병에 걸려 개호를 받지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거기다가 전후의 산업사회는 핵가족제도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분가하여 살다가 보니 젊었을 때는 활발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노인세대가 되었을 때는 자녀들의 도움을 받지못하고 외롭게 살게되고 질병이라도 걸리게 되면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시설의 신세를지지 않으면 안된다.

노후의 최대의 불안은 누가 돌봐 줄 것인가 하는 개호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길러온 자녀들이 돌봐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초고령사회가 되면 평균수명이 80대 중반에 이르게 되고 이 나이가 되면 자녀들이 노령기에 접어들기 시작하거나 은퇴한 년령에 이르니 자녀들의 도움도 받기 어려워진다.

여기에 공적인 부조(公的扶助)가 필요로 하게 되고 노인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사회는 엄청난 부담을 갖게된다. 그러나 선진문화 사회란 그 사회의 약자들을 도와주고 지켜주어야 할 사명이 있기에 정부는 초고령사회를 정책적으로 뒷받침 해 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로서도 전체 예산에서 1/5정도를 복지예산으로 책정하여 특별양호노인홈, 데이서비스, 재택개호지원, 케아하우스(유료노임홈), 노인보건시설, 홈헬파서비스, 방문입욕서비스등의 노인관계의 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사업은 불어난 노인세대의 일부를 겨우 유지 해 줄 정도로 앞으로도 많은 시설을 설치해야 형편에 있다. 이 시설들은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일손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 교회가 여기에 참여하여 봉사하고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복지분야의 선구자들

일본의 사회복지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는 역시 크리스찬들이었다. 전국에 많은 분들이 있디만 몇 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카야마를 중심하여 활동하면서 전국의 시설을 가지고 일한 오카야마의 4성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Alice Betty Adams는 미국인 여자선교사로 래일(来日)하여 오카야마(岡山)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는데 1891년、하나하다지구(花畑地区)의 어린이들과 크리스마스축하회를 하면서 일본최초의 교회학교를 개교하고, 1896년 사립 하나하다진죠 소학교 개교(私立花畑尋常小学校開校)하고, 1899년 하하하다 기독교강의소 개강(花畑기독교講義所開講), 1901년 하나하다 봉제 야학교(花畑裁縫夜学校開校), 1905년 하나하다 시료소개소(花畑施寮所開所)를 설치하여 무료진료(無料診療)를 개시하였다. 이것이 지금도 오카야마 시내에 그녀를 기념하는 병원인, 재단법인 오카야마 박애회병원이다.

도메오카 코오스케(留岡幸助、1864년4월9일 - 1934년2월5일)는、일본의 사회복지의 선구자로、감화원(感化院-현재의 아동자립지원시설)을 설치하여 어린이 교육의 실천가로 활약하였다. 그도 쌀상회를 경영하는 집안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린이일 때 사무라이(무사계급)집의 아들과 싸워서 상처를 입힌 것 때문에 사무라이 집 관련자들이 쌀을 사주지 않으므로 아버지에게 심한 꾸지람을 듣고 집을 나왔는데 그 때 시내에 있는 高梁教会로 가서 선교사의 도움과 영향을 받으며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고, 북해도와 가나가와에 감화원을 설치하여 어린이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시이 주지(石井十次、1865년5월5일 - 1914년1월30일)은、일본 최초의 고아원을 창설한 사람으로서, 「아동복지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진다. 1882年 의학(医学)을 배우기 위해 오카야마시에 이주하였다가 기독교와 접하게 되고 그 후 입신(入信)、 1884년 오카야마기독교회(現日本基督教団岡山教会)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미국에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한 즉시 오카야마, 나고야, 미야사키등 일본 전역에 많은 고아원을 설치하여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야마무로 군페이(山室軍平)는 일본 구세군의 창설자로, 출판공이었으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영어학교에 갔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독교에 입신 후 、동지사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고향인 오카야마의 다카하시교회(高梁教会)에서 전도사가 되고, 23세때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아동학대방지운동을 시작하고, 결핵요양, 부인과 아동보호, 빈곤자들을 위한 의료등 사회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참여하였다.

이렇게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복지분야를 개척하여 일본의 복지를 이끌어 온 선구자들이기에 이들을 가리켜 오카야마의 4성인이라고 불리워진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일본전역의 교회들이 유치원 보육원등을 개설하여 현재는 전국적으로 대략 2000시설 이상의 많은 사회복지 시설을 교회가 가지고 사회복지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활약중인 중요한 기독교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단체는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있다.

구세군 산하 24시설

킹스가든연합 43시설

세레이복지사업단 84시설 종업원 6500명이상

그리스도교 보육소동맹 산하 210시설

그리스도교 보육연맹 산하 818시설

예수단(가가와토요히코) 산하 40시설

사회복지법인 운주사 산하 40시설

사회복지법인 복음사 산하 23시설 등

 

5. 사회복지 시설은 21세기에도 복음선교의 중요한 접촉점이며 선교사들이 주목해야 할 도구이다.

왜냐하면 1970년에 일본은 65세이상의 노년 인구의 비율이 총인구의 7.1%에 달하여 고령화 사회에 진입을 했다.(유엔은 1956년 보고서에서 65세이상의 인구가 전체인구의 비율이 7%에 달할 경우 고령화사회로 구미선진국의 수준을 기준으로 정하였다.) 그 기준에 따라 배가되는 14%를 초과할 경우 고령사회로, 3배가 되는 21%를 초과할 경우 초고령사회라고 말한다.

일본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여 겨우 24년후인, 1994년에는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그 위에 고령사회에 진입하여 불과 13년 후인 2007년에 초고령사회로 진입하였다. 1년후인 2008년 9월15일현재 22.1%라고 한다.(www.stat.go.jp일본 정부 통계국 발표)

전체인구의 22.1%가 노인세대가 되어있고, 그들중에 상당수가 복지관계의 시설에 입소중이거나 이용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입소할 수 있는 환경을 교회가 앞장서서 설치한다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때는 늦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생의 황혼기에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6. 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재정문제

특별양호노인홈의 경우,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짓기 위해서는 토지가 700평 이상이 필요하다. 지금의 일본교회의 평균 재적율이 30여명이라고 한다.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토 지는커녕 목회자의 사례를 부담하기도 힘든다. 그런데 어떻게 700평을 마련할 것인가? 이 부분은 여러 가지 연구해야 할 분야라고 하겠다.

본 선교사가 파송되어 3여년이 지났을 때 즉, 80년도 중반에 김포공항 근처에 있던 서안복음병원 원장과 외과과장 장로가 한국에서 최초로 말기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호스피스를 설치하기 위해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 있는 세레이복지사업단(聖隷福祉事業団)을 안내 해서 통역을 부탁하였기에 따라갔다가 귀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세레이복지사업단을 세우신 창업주인 하세가와 다모츠(長谷川保)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분은 일본이 전쟁으로 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복구를 위해서 여념이 없을 때 가난병이라고 할 수 있는 패병이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서 홈레스 생활을 하는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때마침 우치무라 간죠(내촌감삼) 선생님에게 성경을 배운(하세가와다모츠、여호와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神よ、私の杯は溢れます 미넬바서방,1983,P21.)후, 하세가와 다모츠 선생은 크리스찬 청년 친구 몇 명과 함께 이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허름한 시설을 마련하고 그들을 모아서 치료하며 침식을 제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들을 돕기 시작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게 되었고 병에서 고침을 받고 사회에 복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소문이 그 도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고 하세가와 선생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연속 7회나 당선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법률정비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일본국 헌법 25조를 법제화하여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생활보호법을 만드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의 교회가 작은 것을 감안하여 사회복지 시설을 할 때 교회가 참가할 수 있도록 법을 정비하였는데 시설의 건설자금중 2/4는 정부가, 1/4은 시나 구가 부담하는 방향으로 하여 경영자는 1/4만 부담하도록 하였다. 즉 10억엥의 공사비가 든다면, 5억은 정부가, 2억5천은 도나 시나 구가 부담하도록 하여 시설경영자는 2억 5천만원을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것도 의료복지재단이 저리로 빌려주는 데 이 돈을 사용하여 상환해 가면 된다. 교회의 경우 목회자가 시설장이 되면 거기서 월급이 나오니 저리로 빌린 부채를 갚아나가면 대략 10여년이면 다 상환할 수 있게 된다.

하세가와 다모츠 선생의 이같은 내용의 정보를 얻어, 본 선교사도 도요하시 시내에 있던 교회의 부지 61평을 팔고 넓은 땅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기도에 집중하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그 때 크게 도움을 받은 것은, 법을 공부한 것이었다. 즉, 본 선교사가 일본을 선교하기 위해서 일본 사회의 돌아가는 형편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길은 법을 아는 길임을 알고 도요하시 시내에 있는 아이찌대학 야간부에 법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낮에는 목회를 해야하기에 밤시간을 이용하여 법을 공부하면서 일본말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대학원까지 6년간 공부하였는데, 그 때 배우던 법이 이 때 기지를 발휘케 해 주었다. 일본에는 종교법인은 시가화조정구역(그린벨트) 에 지을 수 있다는 법조항이 있었다. 이 법을 이용하면 땅을 싸게 사게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보통의 택지는 비싸기 때문에 시가화조정 구역을 찾기 시작하였다. 부동산 회사에 몇 군데 연락을 해 두었더니 속속 정보가 들어와서 도심지 역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300평이 있었다. 우선 이 땅을 사고 나머지는 추후로 사들이로 작정하고 300평을 택지보다 약1/8정도 싸게 구입을 하였다. 그리고 1천만엥 정도는 건축비로 전환할 수 있었다. 물론 시가화조정구역을 구입하였을 때 따라오는 복잡한 수속도 있다. 농지였기에 농지를 택지로 전환하는 수속을 해야하고 300평이상은 허락을 받고 개발을 해야하는 여러 가지 절차도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도와주셨다. 여기까지 오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에서 단기선교로 오는 성도들의 기도였다. 성도들이 올 때마다 그 땅에 데리고 가서 1200평에 10억엥 공사를 하겠으니 그렇게 되도록 기도 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이렇게 허허벌판에 큰 빌딩이 서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기도를 심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하던 대로 대부분을 이루어 주셨다.

그리고 나고야교회의 사회복지법인 영생원의 이사장으로 수고하시는 김광수 장로에게 이제까지의 일을 이야기 하면서 나고야교회의 사회복지법인을 이용하여 도요하시에도 특별양호노인홈을 설치 해 주기를 요청하였더니 김장로가 같이 도요하시 시청에 가보자고 하여 가서 담당과장과 면담을 하였더니 그 해의 계획은 전부 시행되었기에 다음에 시설을 계획 할 때 연락을 할테니 엽서에 주소를 적어놓고 가라고 하여, 그대로 하고 돌아왔다.

교회건축이 완료된 후 얼마 후 본 선교사는 현재의 교회로 이동하였는데 후임으로 들어 온 목사가 사회복지를 전공한 목사였다. 그가 부임 후 얼마 후에 우리에게 땅을 팔았던 지주가 또 그 옆땅 300평을 사라고 한 것이다. 그것을 나고야교회의 김광수 장로와 이종선 장로가 각각 2천만엥씩 빌려줘서 4천만엥에 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도요하시시에서도 노인홈을 경영해 보려면 응모하라는 엽서가 와서 나고야교회의 법인인 영생원 도요하시로 응모하여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하나님이 기도를 심어놓은대로 응답하시는 모습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 50명 수용의 특별양호노인홈의 시설을 세우려고 설계를 하고 예산을 봅아보니 약8억5천만엥이었다. 교회가 이동하는데 약 6800만엥에 들어갔는데 합해도 10억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요하시 시청이 기왕에 할바에 80명 수용시설을 하라고 해서 설계변경하니 9억5천만엥이 되어 교회짓는데 들어간 돈과 합하니 10억을 넘겼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까지도 정확히 하심을 보고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옛말에 “살리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다”말이 있다. 무사들이 백성을 다스릴 때 생활하고 남을만큼도 안주고 먹지못해 죽음정도로 적게 주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사회복지 정책에도 이 원리를 도입하는 것 같다. 일본 정부는 사회복지 사업을 돈을 버는 기업처럼 남게도 주지않고 망하게 할 정도로 적게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가 사회복지 사역을 하게되면 적어도 교역자 사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즉 교역자가 시설의 시설장이 되면 월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시설을 통하여 사회에 기여하기도 하고, 적은 양무리들과 목회현장에서 일감도 적은데 이런 사업을 통하여 봉사함으로 목회자의 일감도 많아지게 하고 무엇보다 시민들과 접촉하여 복음의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임해야 하리라고 본다.

일본의 사회복지분야에 가장 헌신적으로 봉사한 분이 하세가와 다모츠씨이다. 하세가와 다모츠 선생은 폐병환자들이 시내에 있다는 것으로 많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방해로 견디다 못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미가다하라대지의 넓은 밭으로 시설을 이동하여 지금은 60만평방미터의 넓은 땅에 종합병원을 비롯한 간호대학이며 각종 복지시설을 현대식으로 갖추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약 150여 시설에 6500명이상의 종업원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에 크게 봉사하고 있으며 선생 자신도 소천전에 자신의 몸을 헌체하여 의학도들이 실습케하고 그 뼈도 화장하지 않고 잘 표백하여 지금도 간호대학에 진열되어 사람의 뼈의 구조를 의학도들이 연구하도록 제공하시고 가셨다. 우찌무라 간죠 선생님에게 성경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이웃을 내몸과같이 사랑하며 실천하시다가 가시면서 뼈 한조각 헛되이 하지 아니하시고 완전한 제물로 이웃에게 주고 가셨다.( http://www.seirei.or.jp에 그분이 남기고 간 세레이후쿠시사업단 홈폐이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상 간단히 살펴본대로 선교의 현장은 문화와 함께 가야하고 선교사들이 보여준 교회개척과 의료사업, 사회복지 사역은 복음과 함께 선교사 누구나가 관심을 가져야할 도구로서의 접촉점임을 명심하였으면 한다. 관심이 있으면 길이 열리고 길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주어진 자신의 길에서 그곳에 사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시에 주신 가장 좋은 문화를 가지고 접근 해 가는 것이 우리가 목표하고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이 된다.

덧붙여 말하고싶은 것은 어느 분야에든 개척자들이 있고 그 분야에 성공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 분들을 가까이하면 반드시 배울 것이 있고 유익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을 가까이 가는 일도 우리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라고 본다.

필자는 일본에서 하세가와 다모츠 선생님을 잠간 만난 것이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분처럼 살다가, 그분처럼 이 시대를 섬기다가, 하나님앞에 섰으면 하는 마음 가짐을 하면서 오늘도 주어진 선교의 현장에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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